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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난 잔치에 먹을 거 없는' 한국판 블랙프라이데이
기사입력| 2015-10-05 10:29:52
'소문난 잔치에 먹을 거 없다'라는 말이 딱 맞다. 바로 '한국판 블랙프라이데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정부는 내수 경기 살리기를 위해 10월 1일부터 14일까지 2주 동안 한국판 블랙 프라이데이 행사를 기획하고 주도했다. 정부는 '대형유통업체 2만6000여곳 참여', '업체별 최대 50~70% 할인' 등의 거창한 타이틀을 내걸고 블랙프라이데이 행사를 대대적으로 홍보하며 소비자들의 기대치를 높였다. 미국이 원조인 '블랙프라이데이'는 1년 중 가장 물건이 싼 세일기간으로 미국이 들썩거릴 정도로 엄청난 폭탄세일과 새벽부터 몰려드는 소비자들 때문에 쇼핑몰이 장사진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판 블랙프라이데이 뚜껑을 열었더니, 실망감 섞인 목소리들만 가득하다. 폭탄세일은 커녕 실질적으로 소비자들이 체감할만한 할인 제품들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전과 명품 패션 등의 업체들은 아예 한국판 블랙프라이데이 행사에 참여하지도 않았다.
▶고가제품 빠진 블랙프라이데이는 '속빈 강정'
지난 1일부터 한국판 블랙프라이데이가 시작됐지만, 소비자들의 반응은 시원치 않다. 오히려 '속았다', '대국민 사기극이다' 등의 반응까지 보이며 실속 없는 한국판 블랙프라이데이를 비판하고 나섰다.
미국의 블랙프라이데이는 업체들이 1년을 준비할 정도로 대규모 행사다. 소비자들 역시 1년 동안 블랙프라이데이 때 어떤 물건을 구매할 지 미리 준비하고 온·오프라인에서 저렴한 물건을 구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선다. 할리우드 영화나 뉴스에서 고객들이 새벽부터 백화점, 쇼핑몰 등 앞에서 기다리다가, 문이 열리자마자 매장으로 달려 들어가는 모습이 바로 블랙프라이데이의 대표적인 이미지다. 그 정도로 좋은 물건들을 싸게 팔기 때문에 이를 잡으려는 소비자들의 경쟁이 치열하다.
그런데 한국판 블랙프라이데이의 모습은 한산함 그 자체다. 오히려 대형마트나 재래시장은 추석 연휴 이후여서인지 더 사람이 없다. 추석 연휴 이후는 유통가에서 대체로 비수기로 통한다. 정부에서 블랙프라이데이 행사에 동참하라고 해서 했는데, 소비자는 오히려 줄어든 셈이다.
소비 진작을 위해 정부가 나서, 내심 기대를 했던 상인들은 속만 상할 뿐이다. 소비자들 역시 가을 정기세일이나, 평소와 비슷한 10~20%의 할인율을 내세운 블랙프라이데이에 실망하긴 마찬가지다. 이미 해외 직구를 통해 눈높이가 올라간 소비자들은 미국 블랙프라이데이처럼 절반 값으로 좋은 물건을 구입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으나, 블랙프라이데이라는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는 낮은 할인율에 지갑을 닫았다.
우선, 고가의 가전제품과 명품브랜드 제품들이 블랙프라이데이에서 빠진 게 가장 큰 실패 요인이다. 미국에선 블랙프라이데이 때 대형TV, 스마트폰, 컴퓨터 등 고가의 정보기술(IT)·가전제품들 소비가 폭증한다. 그런데 한국판 블랙프라이데이 행사에 참여한다는 백화점들도 가전제품은 제외시켰다. 가전 제조업체들이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명품 브랜드들 역시 한국에서 고가정책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판 블랙프라이데이에 참여할 이유가 없다. 또한 미국의 블랙프라이데이인 11월 말과는 달리 한국의 10월은 시기적으로도 명품브랜드, 패션 업계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힘든 시기다. 가을 신상품을 판매해야할 시기이지, 블랙프라이데이 행사로 할인해서 물건을 팔수가 없기 때문이다.
백화점 관계자는 "고가 가전이나 IT제품 등은 블랙프라이데이 할인 대상이 아니다. 명품은 재고 정리 시즌이 여름과 겨울이라, 그때에만 세일을 진행한다. 10월은 브랜드들이 정책적으로 세일을 진행하기 어렵다"며 "미국은 제조업체들이 블랙프라이데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데, 우리는 주요 제조업체들은 빠지고 유통업체들이 참여하기 때문에 할인율을 높이는데 한계가 있다"고 전했다.
이런 이유로 한국판 블랙프라이데이는 고가 가전보다는 대부분 식품과 속옷, 양말 등의 생필품류가 많다. 소비자들이 체감하지 못하는 이유다. 행사를 크게 한다는 백화점들도 상황은 비슷하다. 신세계백화점은 블랙프라이데이 기간 동안 일반 브랜드 할인율이 10~30% 수준으로 지난해 가을 세일 수준과 비슷하다. 롯데백화점 본점 역시 행사장에서 구두·핸드백·주방용품·아웃도어 등 80여개 브랜드 150억원어치 제품을 최대 70% 할인해 판매하지만, 이 역시 지난해와 비슷한 수준이다.
▶백화점, 유커 덕에 반짝 매출 상승… 블랙프라이데이 성공은 '의문'
블랙프라이데이 기간 동안 백화점들 매출이 두 자릿수 성장을 할 정도로 사람이 북적거리고 있다. 마치 블랙프라이데이 효과가 나타나는 듯 보인다. 그런데 백화점 고객들의 대부분이 중국인 관광객(유커)들이다. 바로 10월 1일부터 7일까지 국경절 황금연휴를 맞아 한국을 찾은 중국 관광객들이 백화점 매출을 이끌고 있는 중이다.
롯데백화점이 지난 1일부터 3일까지 실적을 분석한 결과, 전년 같은 기간에 비해 매출이 23.6%나 증가했다. 품목별로는 구두(62.8%), 핸드백(42.1%) 등 고가 제품군과 아웃도어(28.8%), 주방식기(20.3%) 등 기획전에 참가한 품목들의 매출이 크게 증가했다. 단기간이지만, 롯데백화점의 두 자릿수 매출 신장은 2011년 12월 송년세일 이후 처음이다.
현대백화점 역시 1~3일 매출 실적이 전년 동기와 비교해 27.6% 늘었다. 가을 혼수 시즌을 겨냥한 모피 행사 등이 호응을 얻으며 여성의류 매출이 32%나 증가했다. 해외패션(21%), 잡화류(18.1%), 남성패션(14.7%), 아동스포츠(12%) 등 패션 상품들의 매출이 늘었다. 신세계 백화점 역시 전년 대비 매출이 36.7%나 증가했다. 여성 의류(54.7%), 주얼리 ·시계(57.4%), 가전(79.5%), 침구류(51.9%) 등의 매출 증가율이 높았다.
이처럼 한국판 블랙프라이데이 기간인 지난 3일 간 백화점들은 활짝 웃었지만 블랙프라이데이와는 거리가 멀다는 지적이다. 예컨대 롯데백화점 본점의 경우 지난 1일부터 2일까지 중국인들이 사용하는 은련카드의 매출이 전년대비 76.2%나 증가했다. 결국 백화점 매출도 중국인 관광객들이 이끌고 있는 셈이다. 중국인 관광객이 잘 찾지 않는 대형마트와 재래시장 등이 블랙프라이데이에도 한산한 이유다.
거창하게 막을 올린 한국판 블랙프라이데이가 곳곳에서 벌써부터 부실을 드러내자, 유통업계에서는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무엇보다 갑자기 정부가 행사를 주도하며 블랙프라이데이가 시작돼, 유통업계나 제조업체들이 제대로 준비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블랙프라이데이라고 해도, 기존 정기세일과 별반 차이가 없는데 정부에서 블랙프라이데이라고 타이틀을 걸어준 셈"이라고 말했다. 이어 "판매 수수료가 주요 수익인 한국의 유통업체들은 할인율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면서 "미국처럼 제조업체들이 대거 참가하지 않고, 유통업체가 주도하는 한국판 블랙프라이데이는 성공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박종권 기자 jkp@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