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 살균제 사태로 가장 많은 사망자를 낸 옥시RB코리아(옥시)가 이번 사태에 대해 공식 사과하고 독립기구를 구성해 '포괄적인 피해보상'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문제가 된 가습기 살균제(제품명: 옥시싹싹 뉴가습기 당번)를 내놓은 지 15년 만이다.
아타 울라시드 사프달 옥시 대표는 2일 여의도 콘래드호텔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가습기 살균제의 모든 피해자와 가족들에게 머리를 숙여 가슴 깊이 사과를 드린다"며 "신속히 적합한 대책을 내놓지 못한데 대해 전적으로 책임을 받아들이겠다"고 말했다. 사프달 대표는 이날 옥시RB코리아의 대표이지만 영국 본사도 대표한다며 자신의 사과가 한국법인과 영국 본사 모두를 대표한다고 밝혔다. 그는 영국 본사 최고경영자(CEO)가 미안하며 자신을 대신해 사과해달라고 요청했으며 이날 발표하는 모든 방안에 대해 본사가 전폭적인 지원을 할 것이라고도 전했다.
사프달 대표는 "(정부의 피해조사) 1등급과 2등급 판정을 받은 피해자 가운데 옥시 제품을 사용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포괄적인 보상안을 마련하고자 한다"며 "인도적 기금은 가습기 살균제 사건으로 인해 고통 받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사용할 것"이라고 밝혔다. 1·2등급 피해자에게는 보상안을 제공하고 인도적 기금 100억원을 조성해 3·4등급 피해자를 위해 쓰겠다는 것이다. 그는 "모든 피해자가 공정하고 조속한 보상받을 수 있는 명확한 체계를 제공할 필요가 있다"며 "(조사와 보상을 위해) 독립적인 패널(기구)을 오는 7월까지 구성하겠다"고 말했다.
옥시는 옥시 제품을 포함해 여러 제품을 함께 사용했던 피해자에게도 공정한 보상을 하겠다고 약속하는 한편, 타 제조·판매사도 함께 조사·보상 절차를 진행해 달라고 촉구했다. 정부의 1·2차 가습기 살균제 피해현황 조사에 따르면 살균제로 인한 피해가 거의 확실(1단계)하거나 가능성이 높은(2단계) 피해자는 모두 221명이다. 조사 대상 530명 가운데 옥시 제품을 쓴 사용자(타 제품과 함께 쓴 사용자 포함)는 404명(80.3%)인 것으로 알려졌다.
옥시는 1996년 출시한 가습기 살균제를 리뉴얼해 2001년부터 독성 화학물질인 폴리헥사메틸렌구아디닌(PHMG) 성분이 든 살균제를 판매해왔다. 2013년 쉐커 라파카 당시 대표가 국정감사에 출석해 이번 사건에 대한 사과의 뜻과 50억 원 규모의 피해자 지원기금 조성 계획을 밝혔고, 검찰 수사가 본격화한 올해 들어서야 공식 입장자료를 내고 공식으로 사과했다.
그러나 옥시의 이 같은 발표에도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가족들의 분노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피해자 가족들은 옥시의 사과 간담회가 검찰 수사를 피하기 위한 면피용일뿐이라며 진정한 사과를 하라고 주장했다. 같은 날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유가족 연대(유가족연대)는 "5년간 옥시는 가습기 살균제 사건에 대해 사과를 요구한 피해자의 한 맺힌 눈물을 외면하다 검찰 수사가 진행되는 시점에 기자 간담회 형식의 사과를 내놨다"며 "유가족연대는 이를 거부한다"고 밝혔다. 이어 "옥시는 수백명이 사망하는 전대미문의 대참사를 유발하고도 법인을 해산하고, 사명을 두 번씩이나 변경하며 온갖 거짓과 위선으로 사건을 은폐·축소했다"며 "옥시의 자진 철수를 요구한다"고 덧붙였다. 언론을 이용한 사과가 아니라 피해자들을 직접 만나 '명백한 옥시의 잘못'이라는 점을 인정하는 사과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이날 기자회견장에서 최승운 유가족연대 대표는 아타 사프달 대표와 격론을 벌이다 단상에서 자신의 사연을 이야기하며 울부짖었다. 최 대표는 "아이가 만 1살에 병원에 입원해 8개월 만에 사망했다"며 "아이를 잘 키워보려고 사용한 가습기 살균제 때문에 내 손으로 4개월 동안 아이를 서서히 죽였다"며 눈물을 흘렸다. 그는 피해자들이 큰 고통을 받다 숨졌다는 점을 거듭 강조하며 옥시가 아직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무성의한 대응을 하고 있다고 질타했다.
한편 가습기 살균제 사망 사건을 수사하는 검찰은 옥시의 제품 개발·제조 부문의 수사를 일단락하고 이번 주부터 판매 부문 관련자들을 출석시켜 조사할 방침이다. 또 옥시가 지난 10년간 판매한 제품 전체를 대상으로 '전수조사' 개념으로 수사해 추가 피해 사례·대상을 추적한다. 검찰 등에 따르면 수사는 ▲제품 첫 개발·제조(2000∼2001년) ▲제품 본격 판매(2001∼2011년) ▲증거 인멸·은폐(2011년 이후) 등 세 갈래로 전선을 넓히고 있다. 수사의 초점은 옥시 측이 제품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서도 별다른 조치 없이 판매를 지속했는지 여부다. 옥시 측은 2001년 초 PHMG이 함유된 제품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이후 호흡 곤란 등 부작용을 호소하는 항의성 민원이 지속적으로 옥시 측에 전달됐다. 하지만 옥시는 사실상 이를 무시하고 정부 당국이 폐손상 사망 등과의 인과관계를 확인해 회수 조치를 한 2011년 중반까지 제품을 계속 판매했다. 옥시 측이 약 10년간 판매한 제품 수는 453만개에 달한다. 이 가운데 상당수는 유해제품으로 추정되지만, 공식적으로 피해가 인정된 사례는 극히 일부다.
정부가 폐손상 피해를 본 것으로 확인한 인원은 221명이며 이 가운데 177명이 옥시 제품 이용자다. 사망자도 90명 가운데 70명으로 가장 많다. 제품의 부작용을 어느 정도 인식하고서도 제품 회수나 판매 중단 등 적절한 조치를 하지 않았다면 업무상 과실치사 또는 과실치상 혐의가 적용될 수 있다. 전수조사가 이뤄지면 현재 옥시가 제한적으로 인정한 유해 제품의 종류·범위나 대상이 크게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 불법행위가 자행된 기간도 늘어나게 된다. 특히 10년이 넘는 기간 수많은 사상자가 누적된 점에 비춰볼 때 혐의가 확인되면 처벌 강도가 훨씬 높아질 수 있다. 이규복 기자 kblee341@sportschosun.com